제40화
아아!!
두 사람은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문(門)에 들어가서
동문의 낭도들과 함께 풍류와 인격수양에 전력하였었다.
"화랑은 여러 가지로 세상을 위한 좋은 일을 해야겠지만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나라를 위한 싸움터에서 꽃답게 죽어서 인생의 최후를 장식하는 것이 으뜸이다.”
"누구는 또 누구는 적군과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해서 지금까지 이름이 남았다. 우리 뒤에도 영원히 이름이 남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흠운과 경우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맹세했다.
"우리도 화랑문중에서 수양하는 바에는 장차 그런 용자가 되자.”
그후로 그들은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흠운은 내물왕 8대손으로 발손 벼슬을 한 달복의 아들이었으며,
경우는 소지왕 6대손으로 아찬 벼슬을 한 무의의 아들이었다.
둘은 천성이 총명한 바탕 위에 노력이 비상했으므로
동문 중에서 단연 학문과 무술에 준재의 두각을 나타냈다.
전밀법사는 특히 두 사람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군대의 우두머리는 둘이 있을 수 없는 법,
처음 선봉으로 먼저 발탁된 흠운은 언제나
경우의 상관으로 출정하였다.
흠운에게 경우는 늘 없어서는 안 될
뛰어난 참모였다.
여태까지 흠운이 거둔 승전은 기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경우의 용맹에 있었다.
경우가 없었던들 흠운은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흠운은 선봉으로 나선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승승장구,
그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은 바로 승리를 의미했다.
그로 인해 왕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
싸움에 나선 병졸들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흠운의 이름은 나날이 높아져 갔다.
"흠운장군!"
"흠운장군!”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흠운은 선봉을 택해야만 했고,
나라의 운명이 걸린 싸움터에는 언제나 흠운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흠운은 경우로
부장을 삼았다.
"직책엔 각각 맡은 바가 다르지만 나라를 위한 싸움엔 자네나 나나 다름이 없지 않겠나? 죽을 때는 내 목숨도 하나요, 자네 목숨도 하나지. 내가 비록 낭당대감이라고 해서 더 좋은 숙소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화랑도장에서 배우지 못했네. 병졸들과 고락을 같이 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임을 받으려는 천박한 술책에서가 아니라 그들과 침식을 꼭같이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세. 결국은 나를 위해서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닐세. 자네가 나 때문에 불편하다면 자네의 처신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경우는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흠운의 부대는 백제의 접경 지역까지 진출해서
양산(陽山)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沃川:옥천)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날.
그 날 밤.
밤 강행군에 지친 병졸들은 곤한 잠에 떨어졌다.
마침 그믐께라 한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두운 밤이었다.
흠운은 병졸들이 잠든 뒤에 진지를 돌아다녀 보고,
최전선 보초를 위로한 뒤에
그보다도 더 나아가서 말 고삐를 나무에 매고,
말 위에서 적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 때.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풀을 헤치고 포복해 오는
적병의 기척이 들려왔다.
그 조심성 있는 버시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이 한군데서가 아니고
사방에서 조수가 조용히 밀려드는 것과 같았다.
분명 대대적인 내습이 아니라
누군가를 노리고 잠복해 있는 적병들 같았다.
흠운은 막사가 정해지고 병졸들이 잠들면
언제나 병채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적군이?
흠운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번개같이 나무에 매어 있는 말고삐를 갈랐다.
급작스런 동작에 놀란 말이 울부짖었다.
흠운은 세차게 말고삐를 잡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말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허둥댈 뿐이었다.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얼마만큼의 적병인지 자신만을 노리고
매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둠을 틈탄 쩍의 대대적인 내습인지,
흠운은 적병의 규모가 자신만을 노린 매복이기를 바랐다.
만일 그것이 아니고 적의 대대적인 내습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부하들은 긴 행군에 지쳐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다.
아무리 빨리 군장을 차린다고 해도
밀려드는 백제병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적병들은 이곳 지리에 밝다.
흠운은 우선 고함부터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병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이라면
그들에게 확실한 목표물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신라의 진지에서도 적의 내습을 알아챌 것이다.
흠운은 짧은 순간에 죽음을 생각했다.
그 순간 장검을 치켜든 흠운에게 매달리는 것은
선례였다.
아니 경우였다.
자신 때문에 늘 선례의 뒷전에서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던······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러나······그럴 리가?
"전 그런 것 몰라요. 화랑이니 나라니, 그런 건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전쟁에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선봉에는 서지 마셔요. 전 어느 하루도······”
흠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조건 앞으로 나가야만 된다.
그래야만 아군의 진지와 멀어질 수 있다.
흠운은 미친 듯 울부짖고 있는 말에 채찍을 날렸다.
갈기가 떨어질 만큼 세찬 채찍질을 받은 말은
무섭게 앞으로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형체가 분명치 않은 군졸들이 앞을 가로막아 서고 있었다.
"누구냐?"
"적병이다! 적병이다!”
목청껏 외치는 고함은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진.
자신의 부하들을 깨움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본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만한 소란이면 당연히 군사출동이 있어야 한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전선 시찰 때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경우가 오늘은 자신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흠운은 무조건 앞으로만 달렸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적병이라면 의당.
혼자 있는 자신에게 벌떼처럼 몰려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졸들은
자신을 포위하고만 있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한명의 군졸도 볼 수가 없었다.
이건 필시 무슨 곡절이 있다.
흠운은 앞으로만 내달리던 말머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방향을 틀어 잡는 순간
여태껏 보이지 않던 군졸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칼과 창을 든
두 패의 군졸들이었다.
앞에는 칼을 든 군졸들이고,
뒤편은 칼을 든 군졸들을 엄호해 줄 화살을 쟁긴 복면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흠운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장검을 쥔 손끝이 떨려왔다.
그리고 힘이 풀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백제병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구려병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칼을 든 복면들이 앞에 서고 화살을 든 복면들이 뒤에 섰다면,
그건 화랑에서 배운 매복전술,.
흠운은 다시 눈을 떳다.
"너희들은 누구냐?"
흠운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서걱거림만이 들릴 뿐.
"너희들은······”
그러나 흠운의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소리로 판단할 때
이 자들은 보통의 병졸들이 아니다.
아까 판단하기로는 수많은 군졸들의 움직임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몇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내는 고수들,
그것도 물론 화랑에서 배운 속임술,
흠운은 장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경우 나오너라!
경우!
그러나 그 소리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안으로 삼키는 큰 한숨일 뿐.
흠운의 한숨이 끝나자마자 화살이 날았다.
흠운은 정신 없이 칼을 휘둘러댔다.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선례, 선례······
그러나 그것도 두렵지 않다.
흠운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 경우란 말인가.
혹, 뒤늦게 자신을 따라 나오다가
저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흠운은 예전 같지 않았던
경우의 눈빛을 떠올렸다.
절 아래까지 와서 전밀법사를 만나지 않았던
그 눈빛.
어명이 무서워서 전밀법사를 만나지 못할
그런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흠운은 기어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화살에 맞아서 떨어졌는지 아니면
말이 화살에 맞아서 쓰러졌는지
그것마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경우만을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지만 어떻게?
자신이 경우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흠운의 눈에서는 빗발처럼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억지고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그 때였다.
자신 앞에 마주선 복면.